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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청양교회 - 주보성인

청양성당 주보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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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최경환프란치스코(1805~1839)는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이며 순교자 이성례마리아의 남편으로 충청도 홍주지방의 다래골(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되었을때 제일 먼저 입교한 집안중에 하나였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험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안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주 예수를 보라!”고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샜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뽀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대와 곤장 110대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리이다.” 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바오로2세(Joannes Paulus Ⅱ)에 의해 시성되었다.